진실의 해부
독일인 작가 산드라는 남편 사뮈엘과 아들 다니엘, 그리고 강아지 스눕과 함께 프랑스의 외딴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산드라가 자신을 인터뷰를 하러 온 학생과 대화를 하던 중 위층에서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옵니다.
사뮈엘이 틀어둔 음악소리에 더 이상의 대화가 어려워 산드라는 결국 인터뷰를 중단합니다.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은 강아지 스눕을 데리고 산책을 나섭니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스눕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뛰어나가고 그곳에는 추락해 눈 위에 쓰러진 사뮈엘이 있습니다.
그 후 산드라는 용의자로 재판을 받게 되고 사뮈엘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 밝혀내기 위한 법정 공방이 이어집니다.
부부 사이의 불균형
추락의 해부 시나리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과 그의 동거인 아르튀르 아라리가 함께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매우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감독 쥐스틴 트리에는 법정의 의미를 '우리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곳'이라고 전했습니다.
이 영화 안에서도 산드라와 사뮈엘의 결혼 생활과 부부관계가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재단되고 수많은 억측을 만들어냅니다.
영화 속 단 하나의 진실은 사뮈엘이 추락해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한 명의 배심원이 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증거들은 시각적인 정보가 제한되고 청각적인 정보가 우선시됩니다.
그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이 사뮈엘이 죽기 전날 일어난 부부 싸움의 녹음본입니다.
녹음본을 들으면 누군가가 때리는 소리, 물건이 깨지는 소리 등 폭력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해를 가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결혼 초반, 부부는 영국 런던에서 지냈습니다. 런던은 독일인 아내와 프랑스인 남편 모두에게 타지이고, 둘은 언어도 영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사고 이후 사뮈엘의 고향인 프랑스로 거취를 옮기게 되면서 갈등이 점점 심화됩니다.
산드라에게는 낯선 도시이고 프랑스어로 본인의 생각을 다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뮈엘은 아이의 육아를 본인이 전담하기 때문에 산드라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반면, 자신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산드라의 성공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절해서 이뤄낸 것이라고 여기며 열등감과 낮아진 자존감을 드러냅니다.
서로 국적이 다른 부부는 공통된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지만 결국 둘은 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선택한 진실
영화 중간에 다니엘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격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산드라가 함께 연주를 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은 쇼팽 전주곡 Op.28 No.4 (Chopin : 24 preludes, OP.28 No.4)입니다.
이 곡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이 주 멜로디를 끌고 가는 것과 다르게 왼손이 곡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곡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왼손의 반주를, 산드라가 오른손의 반주를 나눠서 연주하는데 이는 인물의 관계를 다니엘이 주도권을 가지고 변화시킨다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다니엘의 증언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판사는 사람들이 다니엘이 받을 상처를 걱정해서 진실을 왜곡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다니엘에게 재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상처를 받더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고 법정 감시관인 마지는 그에게 '하나를 믿어야 하는데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땐 하나를 결정해야만 한다'라는 조언을 합니다.
다니엘은 두 가지 선택지인 엄마 산드라가 유죄를 받고 수감되는 경우와 무죄를 받고 자신의 옆에서 지내는 경우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지 않았을까요. 생각 끝에 다니엘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결정을 하고 이전에 산드라와 함께 연주했던 쇼팽 전주곡을 혼자서 연주합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진실이며 확신하지 않더라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스눕의 시선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스눕 역할의 강아지 메시는 팜도그 상을(Palm Dog Award) 수상 했습니다.
연기만큼 영화에서 스눕의 역할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아지 이름인 'snoop'의 뜻은 '염탐하다, 정찰하다'입니다.
이름처럼 스눕은 영화에서 사뮈엘의 죽음 이후의 상황을 사뮈엘의 시선을 대신해서 바라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집 안에서 산드라와 조에가 인터뷰를 하는 도중 공을 쫓아 내려온 스눕은 대화를 나누는 둘은 모습을 응시하다가 다시 계단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건인 사뮈엘 추락 이후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목격합니다.
다니엘이 아빠와 아픈 스눕을 데리고 이동하면서 나눈 대화를 회상하는데 사뮈엘은 '스눕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조금 지쳐있을 뿐'이라며 현재 무기력한 자신을 투영한 듯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별하는 순간을 위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도 하는데 그 이후 사뮈엘이 추락해 사망하게 됩니다.
재판이 끝난 뒤, 산드라는 평소 남편이 자던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그 옆으로 스눕이 올라와 함께 잠이 듭니다.
평소 산드라는 아래층에서, 사뮈엘은 다락에서 지내면서 다른 공간에 머물렀던 부부의 모습과 다르게 사뮈엘의 죽음 이후에야 남편의 공간에 함께 있는 산드라와 스눕의 모습이 많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부부 관계의 추락만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가족의 모든 관계가 추락하는 듯한 영화였습니다.